1
비가 오락가락하는 오후.
작은 소동 끝에 도착한 펜션에 짐을 내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이때다, 싶게 빗줄기가 공기를 가르며 세차게 내리 꽂혔다.
어수선하고 흐트러진 우리의 마음들은,
무방비로 쏟아져 들어온 빗줄기에 우두둑 파문이 일어 흔들렸고,
무엇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빗줄기 넘어 서쪽 기슭 회봉산 자락을 말없이 쳐다봤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둘 젖어 뭉개지고 있었는데,
눈앞의 산허리는 하얗게 운무에 감싸이더니,
한줄기 운무 줄기가 하늘로 휘돌아 솟구쳤다.
우리 앞에 산자락은 그렇게 구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우리는 각자의 물결 속에 침잠되어 갔다.
떠나온 곳을 잃어버린 채.
..

#무릉도원면 회봉산 자락
2
법흥사 계곡에 발을 담갔다.
투명하게 맑은 물이 발목을 적시더니,
기분 좋은 차가움이 종아리를 감싸안았다..
몸 일부가 잠긴 것뿐인데,
온몸에 파란 하늘 같은 청량감이 퍼졌다.
눈앞에 작은 돌탑이 보였다.
투명한 계곡 바닥에 손을 넣어 적당한 돌을 찾았다.
누군가의 작은 돌 위에 나의 더 작은 돌을 포갰다.
조심스럽게,
가벼운 내 마음을 올리는 것뿐인데도,
먼저 놓은 균형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앞선 돌 위에 그보다 작은 돌을 얻는 일이다.
누군가의 무게 위에 그보다 작은 무게를 얻는 일.
그 택함에 감사했다.
..

#법흥사 계곡에서
3
법흥사 계곡 한 귀퉁이에 작은 연둣빛이 반짝했다.
손가락 한마디만 한 어린 소나무 유묘.
잎이라기보다는 가는 바늘을 한 움큼 움켜쥐고 있는 모습.
연둣빛 싱싱함 사이에 적갈색으로 말라가는 몇 가닥이 섞여 있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저 얇은 이끼층 몇 밀리미터 아래,
겨우 손톱만큼의 부식토 어딘가에 발끝을 걸치고 있으리라는 것을.
물이 조금만 불어도, 저 작은 돌무더기는 잠길 것이다.
이 유묘의 앞날은 알지 못한다.
다음 큰비에 뿌리째 쓸려 갈 수도, 이끼층이 마르며 말라 죽을 수도,
혹은 몇 해를 버티다가 바위틈 어딘가에 실뿌리를 더 깊게 내릴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생명력, 의지, 기어이 싹을 틔운 존재에 대한 경외감 같은 말은 이 문장을 쓰는 자의 것일 뿐.
유묘는 그저 거기에, 우연히 데려다 놓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나는 안다. 저 유묘는 나의 서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 형상 하나를 마음에 넣어 왔다.
곁을 지나쳤다는 사실만은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법흥사 계곡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