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은 하나뿐이고 심장이 죽으면 나는 살 수 없다. 팔 하나가 괴사해도 나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상황이고 정상 상태는 아니다. 그렇듯 동물에게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 사이에 회색지대는 없다.
나무는 다르다. 나무 아래 가지 몇 개가 말라 죽어도 꼭대기에서는 새로운 잎이 펼쳐진다. 줄기 안쪽은 이미 죽은 조직(심재)이고 살아 있는 부분은 잎과 생장점과 표피의 얇은 층, 형성층과 그 가까운 주변뿐이다. 즉 나무는 이 순간에도 몸의 상당 부분이 죽어 있으면서 동시에 살아 있다. 이것이 나무의 정상적이고 유일한 존재 방식이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독립적인 생명들의 연합
동물은 배아 발생 초기에 몸의 전체 설계도를 확정하고 각 기관의 수와 위치가 유전적으로 고정된다. 심장은 하나, 눈은 둘, 팔다리는 넷, 이 설계는 이후 수정되지 않는다. 성체가 된 동물은 새로운 팔을 만들거나 여분의 심장을 붙일 수 없다. 몸 전체가 완결된 청사진에 따라 만들어지고 그 설계도 안에서 통합적으로 기능하다가 통합적으로 죽는다. 이를 단일체 구조(unitary body plan)라고 말한다.
나무의 정단분열조직은 이런 설계도가 처음부터 없다. 그 조직은 미분화 상태를 유지한 채, 마디를 만든다. 그 마디에서 잎이 나오고 곁눈이 나온다, 곁눈이 다시 새로운 가지가 되면서 그 끝에 독립된 정단분열조직 즉 생장점이 나온다. 이 과정에 최종 형태라는 개념이 없다. 나무는 완성되지 않고 미완성 상태로 마디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이를 모듈형 구조(modular body plan)라고 한다. 여기서 모듈은 유전적으로 동일하면서 자율적인 단위가 무수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나무는 결국 독립적인 생명체들의 연합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손상이 격리된다는 것
이 모듈형 구조가 갖는 가장 실용적인 효과는 손상에 대한 반응이다. 동물에게 국소적 손상도 전신감염이나 대사 붕괴로 쉽게 이어져 전신의 위기가 될 수 있다. 통합된 시스템이기 때문에 부분의 손상은 전체의 위기로 쉽게 확대된다.
그에 비해 나무의 모듈형 구조에서는 손상이 격리된다. 벼락을 맞아 줄기 한쪽이 타 죽어도, 병충해로 가지 하나가 통째로 고사해도 나머지 모듈들은 각자 물과 양분을 조달하며 생장을 지속한다. 속이 텅 빈 나무는 병든 나무가 아니다. 이 구조가 감당하고 있는 범위를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나무의 나이라는 질문
모듈형 구조인 나무는 시간과의 관계도 다르다. 동물은 몸 전체가 거의 같은 속도로 늙는다. 일부 세포는 며칠 단위로 교체되지만, 신경세포는 태어날 때 그대로다. 적어도 하나의 개체로서 하나의 나이를 먹는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나무에 ‘너 몇 살이니?’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답하기 어렵다. 심재는 어렸을 때부터 만들어진 안정되게 죽어 있는 조직이다. 반면 형성층과 바로 아래 살아있는 조직은 언제나 최근에 만들어진 조직이다. 나무는 나이 든 부분과 갓 태어난 부분이 동시에 한 몸 안에 있다. 나이테는 그 나무가 계절을 건너온 숫자이지 살아있는 조직의 나이가 아니다.
나무는 하나의 개체인가 아닌가?
동물에게 개체성은 거의 자명하다. 하나의 신경계, 하나의 순환계, 하나의 피부 경계,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나’가 아닌지 대체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에 비해 나무는 개체성이 무너진다. 가지 하나는 유전적으로 나무 전체와 같지만, 자율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 즉 나무라는 하나의 개체 안에 하나의 부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의 군집으로 볼 것인지 정답이 모호하다.
우리의 언어가 어색하고 어긋난다.
그럼, 나무의 모듈형 구조는 동물보다 더 나은 전략인가? 손상을 견디고, 부분의 죽음을 격리하면서 수천 년을 살아남은 존재, 그러나 통합된 하나의 몸이 주는 정교한 반응, 단일한 생리적 조정과 무엇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하나의 삶’이라는 서사.
우리는 나무에 우리의 언어를 강요한다. 나이, 개체, 죽음, 생존. 이 단어들은 동물의 몸에서 생겨난 것이고 나무에 이 단어들을 이식하려니 어딘가 어색하고 어긋난다.

# 나무 눈(bud, 아)의 명칭과 분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