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풀린 자물쇠와 도박

아침, 서늘해진 기온을 피부로 감지한다. 아파트 외곽은 누런 잎들이 나뒹굴고 벚나무는 군데군데 잎이 누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효석은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뜰에 쌓인 낙엽을 태우다가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를 맡았고, 거기서 오히려 강렬한 생활의 의욕을 되찾았다고 적었다. 사라지는 연기 속에서 삶에 대한 애착을 길어 올린 그 정서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낙엽을 볼 때마다 비움과 결별을 읽어내게 했다. 그런데 잎자루 안쪽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 사실을 가리고 있었던 건 나무가 아니라 우리의 언어일지 모른다.

잠긴 자물쇠

잎이 가을에 스스로 내려놓기를 결심하는 거라면, 그 결심은 가을에 해야 맞다. 그런데 떨켜, 즉 잎이 떨어져 나갈 그 절단선은 잎이 태어나는 봄, 잎이 완전히 펼쳐지지도 않은 시점부터 이미 있었다. 세포가 작고 세포벽이 얇은 떨켜는 잎자루 기부에 이미 조직적(잎 기부 쪽의 분리층과 줄기 쪽의 보호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여름 내내 이 절단선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잎이 스스로 만들어낸 옥신이 떨켜의 에틸렌에 대한 민감도를 계속 낮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옥신으로 자물쇠를 잠가둔 것이다.

시토키닌

가을의 변화는 그래서 자물쇠를 푼 사건에 가깝다. 밤이 길어지는 것을 감지한 피토크롬은 모든 잎 하나하나의 세포 속에 있다. 즉 이 감지는 나무 전체가 아니라 잎마다 일어난다. 여기에 뿌리에서 물관을 타고 올라오는 시토키닌의 공급이 지온 하강으로 줄면서 잎의 활력을 떠받치던 힘이 함께 빠진다. 즉, 잎의 옥신 생산이 줄고, 나무 전반의 생리를 지탱하던 시토키닌이라는 버팀목이 줄면서 결과적으로 에틸렌이 절단선을 활성화한다. 즉 지지대가 어느 순간 빠지는 것이다.

청산작업

그런데 잎이 떨어지기 직전, 나무는 잎에서 회수할 수 있는 것을 절반 이상 회수해 간다. 질소와 인 같은, 다시 만들기 비싼 자원을 줄기와 뿌리로 다시 돌려보내고, 셀룰로오스로 만든 더 이상 회수할 수 없는 골격 부분만 남긴 채 떨어뜨린다. 이것은 팔 수 있는 자산은 다 팔고 남은 껍데기만 처분하는 청산에 가깝다. 색이 바뀌는 건 그 전 단계 즉, 엽록소가 먼저 분해되면서 원래 있던 카로티노이드(노란색)가 드러나거나 안토시아닌(붉은색)이 합성되는 경우다.

상록침엽수

모든 나무가 같은 식으로 잎을 떨구는 것은 아니다. 소나무 같은 상록침엽수도 떨켜를 만들어 잎을 떨구지만, 나무 전체가 한꺼번에 신호를 맞추는 대신 잎 하나하나가 제 나이에 맞게 떨어진다. 그해 난 잎은 그대로 두고 소나무는 삼사 년 전에, 주목은 오육 년 전에 난 잎만 골라 떨어지기 때문에 한 번도 벌거벗지 않는다. 반대로 낙엽송이나 메타세쿼이아처럼 침엽수이면서 낙엽수인 나무도 있는 것을 보면 결국 잎을 떨구는 것은 하나의 본성이 아니라, 그 나무가 처한 환경에서 계산되는 손익의 문제다.

손익은 결국 겨울철 잎의 유지비용(호흡으로 소모되는 에너지, 언 상태에서도 계속되는 증산으로 인한 탈수 위험, 동결에 의한 세포 파괴 위험)과 겨울철 광합성으로 얻는 이득을 저울질하는 문제다. 저위도의 온화한 겨울에서는 상록이 유리한 계산이 나오고, 혹한의 고위도에서는 낙엽이 유리한 계산이 나오는 식으로 일률적인 정답은 없고 단지 환경마다 답이 달라질 뿐이다.

벚나무의 도박

잎을 떨군 낙엽수는 겨우내 광합성을 전혀 하지 못하고 저장해둔 자원을 까먹으며 버틴다. ‘비움 뒤의 평온’이 아니라 실제로는 가장 취약한 상태로 몇 달을 견디는 강제된 궁핍에 가깝다. 하나둘 빛바랜 잎들을 떨구며, 오늘도 생존을 위한 값비싼 도박을 하고 있을 뿐이다.

#탄수화물의 계절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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