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분해된 물이 산소를 배출하며 만든 에너지(NADPH, ATP)를 이용해 공기 중에 있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포도당을 만드는 과정에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존재한다고 알려진 루비스코(Rubisco)라는 단백질 효소가 중심에 있다.
광합성이라 통칭 되는 이 과정을 위해 기공을 열어 이산화탄소를 붙잡으려는 루비스코는 함께 들어온 산소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산화탄소를 붙잡으면 광합성이 완성되어 포도당이 만들어지고 산소를 잡게 되면 광호흡이라는 낭비가 시작된다. 여기서 낭비라고 말한 이유는 애써 만든 유기물을 다시 에너지를 소모하며 분해하고 겨우 잡아둔 탄소를 다시 공기 중으로 돌려놓기 때문이다. (호흡이라 말한 이유는 탄소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시아노박테리아가 광합성을 시작한 30억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왜 아직도 서투른 과정이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루비스코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지구의 대기에는 산소가 거의 없었다. 즉 루비스코는 산소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광합성이 오랜 기간에 걸쳐 대기를 스스로가 만든 부산물인 산소로 채워 버렸다. 이때 루비스코는 다시 설계되지 못했다. 이미 광합성이라는 거대한 화학 회로가 루비스코를 중심으로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활성부위 하나를 손본다는 것은 이미 거대하게 구축된 시스템을 무너뜨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자연은 우회로를 찾기 시작했다. 일부 식물은 루비스코 앞에 이산화탄소를 미리 농축해 넣어주는 별도의 펌프를 만들었고(C4) 어떤 식물은 밤에만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 저장해두었다가 낮에 꺼내 쓰는 시차 전략을 만들었다(CAM). 이렇게 결함 자체를 고친 것이 아니라 에러가 나타날 확률을 낮추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우회하는 데 자원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산화탄소와 산소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문제는 그 구별을 정확히 하는 효소일수록 반응 속도가 매우 느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반응이 빠르면 오작동이 잦다. 정확함과 빠름을 동시에 누릴 수 없다. 자연은 이 둘 사이 어느 지점에서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른 타협점을 찾아왔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도구를 손에 쥔 채로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을 때가 있다. 그 도구가 애초에 지금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되돌아가 다시 짤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문제를 고치는 대신, 우회로를 찾는다. 결함을 인정하되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하는 것. 나무는 30억 년째 하고 있는 일이다.

정확함을 택하면 느려지고, 빠름을 택하면 틀릴 수 있다. 이 문제에 과연 합리적 타협점이 있을까? 또는 처음부터 타협 자체가 필요 없는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는 있는 일인가?
나무는 오늘도 대답 없이 기공을 열고 산소를 들이마시면서 애써 만든 일부를 다시 내뱉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