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의 처지가 남 일이 아닐지도

열대야가 한풀 꺾인, 오락가락 비에 젖은 오후 가로수길, 짙은 녹음 속에 파묻혀 있는 은행나무가 보였다. 지금은 자세히 살펴봐야 구분될 은행나무가 곧 가을이 되면 노란 잎을 앞세워 그 존재감을 환하게 드러낼 것이다. ‘나 아직 살아있소’하고, 그렇다. 은행나무는 멸종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발목을 잡는 무언가가 있다.

외톨이 은행나무

은행나무 문(門)은 중생대에 여러 속(屬)이 전 지구에 걸쳐 번성했던 계통이었다. 그런데 지금 남은 것은 단 하나, 은행나무 속의 은행나무 한 종뿐이다. 나머지는 백악기 이후 속씨식물과의 경쟁과 결정적으로 씨앗을 퍼트려주던 동물군의 소멸과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은행나무 씨앗은 육질의 외종피에 싸여 동물이 먹고 배설해 줘야 멀리 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순환을 완성해 줄 어떤 동물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 후 은행나무가 겪은 것은 긴 침묵 또는 정지였을 것이다. 수백만 년 단위의 시간 동안, 극소수의 산포자(너구리류, 사향고양이류)에 의지한 채 서서히 개체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 결과뿐으로 중국 남서부 어느 작은 사찰의 서식지에서. 이 나무는 거의 사라질 뻔했다.

취향의 선택

그런데 사람이 왔다. 정확히는 사람의 재배가 있었다. 불교 사찰의 마당에서, 유교 사원의 뜰에서, 이제는 도시 가로수로, 우리는 흔히 ‘인간 덕분에 살아남았다.’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맞는 말이다. 은행나무는 자신의 번식 전략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이 전략은 이미 무력화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은행나무가 지구 곳곳에 서 있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라는 종이 이 나무의 형태와 색과 특유의 부채꼴 잎을, 그리고 그 오래됨이라는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서사를 미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상징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즉 취향의 선택에 의한 결과다.

이례적인 사건

생물학적으로 이것은 이례적인 사건이다. 한 종이 자신의 생식적 자율성을 상실한 채, 전적으로 타자에 의해 그것도 전혀 다른 생물 종의 심미적, 문화적 선택에 존속을 위탁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스스로 퍼지는 종이 아니라, 퍼트려지는 종이다. 이것은 공생이라 할 수 없다. 공생은 상호적 필요를 전제로 해야 한다. 우리가 은행나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씨앗의 식용, 약용성분, 목재, 조경 정도이고 은행나무가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존속 그 자체’로서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비대칭이 자리한다. 인간이 취향을 바꾸면 어떻게 되겠는가?

양도의 결과물

그러므로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이라 부르며 끈질긴 생명력에 경탄하는 것은, 어쩌면 이 나무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반대로 읽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도한 존재, 그 양도의 결과물로서 가로수로 심어 놓고 그 잎이 노랗다는 이유로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

은행나무가 지각이 있어 이 사실을 안다면, 그것을 재앙으로 여길지, 아니면 그저 하나의 생존 방식으로 받아들일지, 이 질문 자체가 자율성을 특권화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투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은행나무의 처지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어떤 것을 조용히 이미 양도해 버렸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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