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들어서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숨을 깊이 들이쉰다. 마치 이 신선한 공기가 방금 저 나무에서 만들어 건네받은 것처럼. 그리고 이내 어떤 감사의 감정이 뒤따른다. 오래되고 당연시되어온 나무가 우리를 살린다는 서사. 그런데 조금만 파고들면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실의 문제다.
광합성은 거의 완벽하게 상쇄된다.
한 그루의 나무가 혹은 숲 전체가 광합성으로 대기에 뿜어대는 산소의 절대량은 실로 막대하다. 하지만 그 나무는 밤낮으로 호흡하며 그 산소의 절반 정도를 스스로 유지하는 데 도로 소비한다. 그 나무가 낙엽을 만들고 어느 순간 쓰러져 고사목이 되면서 소비되지 않고 남아있던 절반의 산소도 균류와 박테리아를 통해 분해되면서 결국 소비하게 된다. 다시 말해 탄소가 유기물로 고정되면서 만든 산소는 다시 산화되면서 사용된 산소와 거의 일치한다. 결국 성숙한 숲에서 산소의 순생산량은 0에 가깝다.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앞서 말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쇄에 작은 틈이 있었기 때문이다. 탄소가 유기물로 고정되었지만 아직 산화되지 못했던 틈, 나무가 퇴적물에 묻히는 바람에 분해되지 못해 생긴 틈(훗날 석탄이나 석유가 된 물질), 나무를 분해할 박테리아나 세균이 미처 발달하지 못했던 가설의 틈, 그렇게 나무가 만들었던 산소를 미처 소비하지 못했던 틈이 지질학적 시간 동안 누적되면서 지금의 산소 농도가 되었다. 오늘의 숲이 지금의 이 농도로 밀어 올린 것이 아니라, 수억 년에 걸친 거의 닫힌 순한 속에 작은 틈 속에 우리는 숨 쉬고 있다.
되감는 행위
인간이 이 화석 연료를 태우는 일은 이 틈을 되감은 행위다. 매몰되었던 탄소를 다시 꺼내 산화시키는 것이므로, 연소는 탄소량만큼 정확히 산소를 소비한다. 실제로 대기 중 산소 농도는 산업화 이후 줄고 있고 이산화탄소는 늘고 있다. 이산화탄소는 산업화 이전 대비 절반 이상 증가했지만(280ppm-430ppm), 산소는 약 0.1% 감소하며 흔들렸다. 여기서 산소의 감소가 위기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대기 중 산소 농도(21%)와 이산화탄소(0.043%) 농도의 비대칭 때문이다. 더불어 산소, 질소는 대칭 분자라 적외선을 흡수하지 못하지만, 이산화탄소는 비대칭 진동으로 적외선을 붙잡는 이유가 더해져서 지구온난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허파의 붕괴
이 모든 것을 통과하다 보면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라는 문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성숙한 열대우림의 순생산량은 0에 가깝고, 최근에는 벌채와 화재로 순배출원이 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결국 “지구에 산소를 공급하는 기관”이라는 역할은 실재하지 않는다. 즉 ‘허파’라는 은유는 어긋난다. 나무는 우리에게 산소를 내어준 적이 없다. 그저 자신의 생리적 평형을 유지해 오고 있을 뿐이다.
남는 것
숲에 들어가 감사를 전하려는 것. 우리에게 목재가 되고, 그늘이 되고, 무수한 생물의 서식처가 되어주기에 이롭다는 활용 가치를 앞세워 도구화하는 것, 이 모두 나무를 인간의 서사 안으로 옮기려는 작업일 뿐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나무는 탄소를 고정하고, 물을 끌어 올리고, 그래서 자신의 평형을 유지하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것에 어떤 서사의 단어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