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자유공원의 플라타너스 보호수를 찾았다. 수없이 방문했을 자유공원이건만 이런 보호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부끄러움 마저 드는 것도, 제물포구락부를 내려와 플라타너스를 보면서 그 웅장함에, 더욱 머쓱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앞에 서서 그 위압적인 높이와 굵은 둘레,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수관폭에 넋이 나간 듯 서 있을 수밖에.
한참을 멍하게 둘러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일반적으로 보던 플라타너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심의 플라타너스는 대개 비슷한 실루엣을 하고 있다. 밑동에서 일정 높이까지 곧게 올라가, 어느 지점에서 여러 개의 굵은 가지가 방사형으로 나오는, 흡사 주먹 위에 빗자루를 얹어 놓은 듯한 모습 말이다. 그런데 이 플라타너스는 그 주먹이 없다. 가지는 줄기에서 자연스럽게 갈라져 나가고, 갈라진 가지는 또 자신의 논리에 따라 갈라진다. 이 나무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나이나 크기 이전에, 이 나무가 한 번도 강제 전정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식물학에서는 수목의 형태가 임의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나무마다 정해진 건축모델이 있으며, 각 모델은 정단분열조직이 활동하는 순서와 방식을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된 문법에 따른다고 했다. 방해받지 않은 나무는 그 문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펼쳐 보인다. 가지치기는 그 문장을 중간에서 끊는 행위다. 정단의 눈이 잘려 나가면, 그 아래 억눌려 있던 잠아가 한꺼번에 깨어난다. 여러 개의 새 가지가 절단면 주변을 방사형으로 솟구치는 이유다. 이 새로운 가지는 원래 문법에 있던 문장이 아니고 임기응변으로 터져 나온 새로운 문장이다.
나무는 손상된 조직을 화학적 장벽으로 둘러싸 격리한다. 절단면 아래의 목질부는 새로운 벽 안에 봉인이 되고, 그 이후의 생장은 그 봉인 위에 새로 얹히는 조직이 된다. 즉 절단된 자리에서 그 가지의 서사는 끊겨버린다. 결국, 가지치기 당한 나무의 수형은 원본이 유실된 채 즉흥적으로 덧씌워진 필사본의 누적이다. 각 필사자는 이전 필사자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문장을 얹는다.
내 눈앞에 플라타너스는 그런 덧쓰기가 없다. 정단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이 발생사를 처음부터 오늘까지 쓰고 있는 유일한 문서라는 점이다.
1884년도 무렵, 개항한 제물포로 들어온 여럿의 플라타너스가 있었을 것이다. 그 대부분은 도로 확장과 시야 확보 같은 실용적 요구 앞에서 정기적으로 가지가 잘려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플라타너스가 공원의 한 기슭, 안쪽에 있었다는 위치 때문일 것이고, 인천상륙작전의 포화를 무사히 통과하여 보호수가 되었던 탓일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서남향의 인천항 부두를 바라보며 쓰이고 있는 유일한 원본이 된 것이다.
다시, 밑동 아래에서 선다.
처음 느꼈던 이상함, 기이한 가지의 낯섦은 원본을 원본으로 알아보지 못했던 낯섦이었다.

